영화 네가 마지막으로 남긴 노래 리뷰 : 결핍을 화음으로 승화시킨 하이데거의 집과 스토아적 운명애

네가 마지막으로 남긴 노래 부서진 활자들 사이로 따뜻한 황금빛 노래가 스며들고, 마주 선 소년 하루토와 소녀 아야네

활자를 잃어버린 소녀와 세상에서 숨어버린 소년의 교감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크고 작은 결핍을 안고 살아갑니다. 영화 네가 마지막으로 남긴 노래는 발달성 난독증으로 인해 세상의 수많은 활자로부터 소외된 소녀 아야네(누쿠미 메루)와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시를 쓰며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소년 하루토(미치에다 슌스케)의 만남을 그립니다. 원작의 가슴 절절한 서사에 로맨스 장인인 미키 타카히로 감독 특유의 따뜻하고 감성적인 영상미 그리고 감동적인 음악이 더해져 관객들에게 짙은 여운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풋풋한 로맨스는 단순한 사랑 놀음이 아닙니다. 상처 입은 두 영혼이 서로의 빈 곳을 찾아내고 글과 목소리라는 매개체를 통해 완전한 하나로 거듭나는 치열하고도 아름다운 실존적 치유의 과정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은퇴 후 블로그 글쓰기를 시작하던 초기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수십 년간 보고서와 기안문만 써오던 저에게 자유로운 글쓰기는 낯설고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첫 글을 올린 뒤 며칠간 아무런 반응이 없었을 때의 고독. 문장 하나를 쓰고 지우고를 수십 번 반복하던 새벽의 외로움. 아야네가 활자 앞에서 무력감을 느끼듯 저도 빈 화면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한 독자분이 선생님의 글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라는 댓글을 남겨주셨을 때 저는 하루토가 아야네의 목소리로 자신의 시가 세상에 울려 퍼지는 것을 들었을 때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내 안의 부족함이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다는 기적.

읽지 못하는 자의 노래와 부르지 못하는 자의 시 

글을 읽는 데 큰 고통을 겪는 아야네는 눈부신 미소 뒤에 남모를 절망을 숨기고 있습니다. 반면 하루토는 풍부한 감수성으로 시를 쓰지만 그것을 세상 밖으로 꺼낼 용기가 없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하루토의 시를 보게 된 아야네 그리고 활자 앞에서 무너지는 아야네를 알게 된 하루토. 두 사람은 하루토가 쓴 가사에 아야네가 숨결을 불어넣어 노래를 완성하기로 합니다.

이 설정이 관객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결핍과 결핍이 만나 완전함이 되는 역설 때문입니다. 읽지 못하는 사람과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만나면 상식적으로는 더 큰 불완전함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정반대의 기적을 보여줍니다. 서로의 약점이 서로의 강점을 깨우는 순간. 미키 타카히로 감독의 일본 로맨스 영화, 난독증을 다룬 영화, 음악과 사랑을 주제로 한 하이틴 영화에 관심 있는 관객이라면 글자라는 감옥에 갇혀 있던 아야네의 멜로디와 침묵 속에 웅크려 있던 하루토의 시어가 만나 폭발하는 감정선에 깊이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수십 년간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저는 글을 잘 쓰지만 발표를 못하는 사람이었고 제 옆자리 동료는 글은 서툴지만 프레젠테이션의 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협업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원고를 쓰면 그가 발표했고 함께 만든 결과물은 각자 혼자 했을 때보다 항상 나았습니다. 결핍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연결되기 위한 통로였습니다.

부서진 활자를 넘어 새롭게 지어 올린 존재의 집(하이데거)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서만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난독증을 앓는 아야네에게 이 존재의 집은 기둥이 무너져 내린 폐허이자 두려움의 공간이었습니다. 반대로 하루토는 시라는 완벽한 집을 지어놓고도 문을 굳게 닫은 채 세상과 단절되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교감하며 노래를 만드는 과정은 곧 서로를 위해 새롭고 따뜻한 존재의 집을 지어주는 숭고한 건축 작업입니다. 은퇴 후 저도 블로그라는 새로운 존재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직장이라는 오래된 집을 떠난 뒤 한동안 저는 갈 곳 없는 영혼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쌓아 올린 블로그가 어느새 저의 새로운 존재의 집이 되어 있었습니다. 하루토의 시가 아야네의 목소리를 통해 세상에 울려 퍼질 때 비로소 두 사람은 닫힌 세계를 깨고 나와 타인과 온전히 연결되는 실존적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고통의 세계를 벗어나는 쇼펜하우어의 연민과 예술적 구원

아야네의 난독증이나 하루토의 고립은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맹목적 생의 의지가 만들어낸 얄궂은 고통입니다. 하지만 하루토는 아야네의 결핍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자신의 언어를 기꺼이 내어주는 연민을 실천합니다. 쇼펜하우어는 모든 예술 중 음악이야말로 인간을 이 맹목적 의지의 고통에서 즉각적으로 해방시키는 최고의 구원이라고 보았습니다. 아야네가 하루토의 가사로 노래를 부르는 순간 두 사람은 현실의 모든 제약과 소외감에서 벗어나 순수한 미적 쾌락과 구원의 상태에 도달합니다.

난독증이라는 사실은 아야네가 평생 짊어져야 할 외부의 운명입니다. 스스로의 좌절감에 무너질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피하지 않고 하루토와 함께 노래 부르기를 선택합니다. 이는 가혹한 운명을 원망하는 대신 기꺼이 긍정하고 사랑하는 스토아학파의 운명애를 완벽하게 보여줍니다.

결론 : 가장 찬란한 순간에 남겨진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존재의 증명

영화 네가 마지막으로 남긴 노래는 이별이 예정된 슬픔 앞에서도 누군가와 온전히 주파수를 맞추었던 찬란한 기억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위로를 건넵니다. 되돌아보는 인생의 여정에서도 결국 우리를 다시 살아가게 하는 것은 완벽한 성취가 아니라 서로의 부서진 집을 보듬어주었던 다정한 연대의 기억들 아닐까요. 오늘 하루 여러분의 삶에는 어떤 언어가 깃들어 존재의 집을 짓고 있는지 조용히 귀 기울여 보시길 바랍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결핍을 기다리는 누군가의 노래가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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