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리, 텍사스 리뷰 : 붉은 사막을 가로지르는 쇼펜하우어적 고독과 스토아적 작별

영화 파리, 텍사스 리뷰 썸네일. 빔 벤더스 감독의 로드무비 명작. 텍사스의 붉은 사막을 홀로 걷는 트래비스와 하늘에 투영된 제인의 몽환적인 얼굴이 담긴 시네마틱 이미지.

우리는 왜 마음속에 가본 적 없는 파리를 품고 사는가

빔 벤더스 감독의 로드무비 성전이자 라이 쿠더의 슬픈 기타 선율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명작. 이 영화는 상실과 고독 그리고 소통의 불가능성을 다룬 가장 아름다운 영상 시입니다. 영화는 텍사스의 끝도 없는 황야를 홀로 걷는 한 남자 트래비스(해리 딘 스탠턴)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그는 말을 잃었고 기억을 잃었으며 세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워버린 듯 보입니다. 영화의 제목인 파리, 텍사스는 트래비스가 구입한 사막 한가운데의 쓸모없는 땅 이름이자 결코 닿을 수 없는 이상향 혹은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상징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이 30대 초반이었습니다. 그때는 트래비스의 고독이 낭만적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은퇴 후 다시 본 이 영화는 완전히 다른 체험이었습니다. 텍사스의 붉은 사막을 정처 없이 걷는 트래비스의 뒷모습에서 저는 은퇴 직후 매일 아침 할 일 없이 동네를 배회하던 제 자신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목적지 없이 걷는다는 것의 자유와 공허가 동시에 밀려오던 그 감각. 젊은 시절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트래비스의 침묵이 수십 년의 세월을 살고 나서야 비로소 온몸으로 이해되었습니다.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말할 수 없는 것. 그 차이를 알기까지 반평생이 걸렸습니다.

침묵에서 고백으로 거울 너머의 진실

동생 월트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온 트래비스는 4년 만에 아들 헌터를 만납니다. 서먹했던 부자 관계는 조금씩 회복되지만 트래비스의 마음은 여전히 아내 제인(나스타샤 킨스키)에게 향해 있습니다. 그는 결국 아들과 함께 제인을 찾아 다시 길을 떠납니다. 붉은 모자를 쓴 채 매직미러 너머에서 여종업원으로 일하는 제인을 마주한 트래비스. 그는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수화기를 통해서만 자신의 지난 과오와 사랑을 고백합니다.

이 장면은 제가 본 모든 영화의 모든 장면 중 가장 슬픈 순간입니다. 빔 벤더스 로드무비 명작, 파리 텍사스 결말 해석, 해리 딘 스탠턴 연기에 관심 있는 관객이라면 이 거울 장면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트래비스가 등을 돌린 채 수화기에 대고 이야기하는 동안 거울 반대편에서 제인이 서서히 그의 목소리를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는 과정. 두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거울이라는 투명한 벽이 그들을 영원히 갈라놓고 있습니다. 이 장벽은 그들이 스스로 만든 것입니다. 사랑이 집착이 되고 집착이 폭력이 되었을 때 세워진 보이지 않는 벽.

저도 인생에서 비슷한 거울을 마주한 적이 있습니다. 오랜 친구와의 관계가 어긋나 수년간 연락을 끊고 살았던 시간. 그 친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직접 얼굴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편지를 썼습니다. 트래비스가 거울 너머로 고백했듯 저도 편지라는 거울 뒤에 숨어서야 비로소 진심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직접 마주보면 무너질 것 같은 감정을 한 겹의 장벽이 지탱해주는 아이러니. 파리, 텍사스는 바로 그 아이러니를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답게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소유욕이라는 맹목적 의지의 파멸과 거울 너머의 연민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가장 강력한 동력을 이기적인 생의 의지라고 보았습니다. 트래비스가 과거에 제인을 감금하고 집착했던 광기 어린 행동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추악한 소유욕 즉 맹목적 의지의 발현이었습니다. 이 의지는 결국 사랑하는 가족을 파탄 냈고 그를 사막으로 내몰았습니다. 하지만 피어크 가의 거울 앞에서 트래비스는 제인을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고백하고 제인의 삶을 있는 그대로 응시합니다.

수십 년의 결혼 생활을 돌이켜보면 저도 아내를 사랑한다는 이름 아래 통제하려 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아내의 결정을 존중하는 대신 제 방식이 옳다고 우겼던 순간들. 트래비스의 과거가 극단적인 형태라면 저의 그것은 일상적인 형태의 같은 본질이었습니다. 거울이라는 장벽을 사이에 두고서야 비로소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온전히 이해하는 연민에 도달합니다. 타인을 나의 도구가 아닌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존재로 인식하는 순간 진정한 구원이 시작된 것입니다.

떠날 줄 아는 자의 위엄 스토아적 아모르 파티(Amor Fati) 

트래비스는 제인과 아들을 재회하게 해준 뒤 그들을 뒤로하고 다시 어둠 속으로 차를 몰고 떠납니다. 이 선택이 이 영화의 가장 위대한 순간입니다. 그는 과거의 잘못에 짓눌려 살거나 다시 억지로 가족을 결합하려 욕심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과오의 결과인 이별이라는 가혹한 운명을 기꺼이 긍정합니다. 사랑하기에 떠난다는 역설적인 결단은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고 이성적인 내면의 성채를 세운 자만이 할 수 있는 숭고한 행위입니다.

은퇴라는 것도 어쩌면 떠남의 한 형태입니다. 수십 년간 쌓아온 것들을 내려놓고 뒷사람에게 자리를 물려주는 행위. 처음에는 아쉬움과 상실감이 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았습니다. 잘 떠나는 것도 하나의 능력이라는 것을. 트래비스가 어둠 속으로 차를 몰고 떠나는 마지막 뒷모습은 패배자의 퇴장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 단단한 이성적 주체의 출발입니다.

결론 : 상처를 품고 다시 길 위에 서는 우리 모두를 위하여

파리, 텍사스는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상처를 직시하고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역시 각자의 가슴 속에 가본 적 없는 사막 한 조각씩을 품고 살아갑니다. 트래비스처럼 때로는 길을 잃고 침묵 속에 자신을 가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말합니다 거울 너머의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있다면 그리고 나의 오만을 버리고 타인의 슬픔에 귀 기울일 수 있다면 우리도 다시 인생이라는 길 위에 설 수 있다고 말이죠. 붉은 석양이 지는 텍사스의 하늘 아래 여러분의 고독이 찬란한 사유로 바뀌는 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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