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이 굽는 엄마 리뷰 : 맹목적 고통을 녹이는 연민의 파이와 스토아적 인내
60년 섬김의 기록 그 향기로운 인생의 레시피
누구에게나 엄마는 그리움의 대상이지만 영화 파이 굽는 엄마 속 트루디 여사는 조금 더 특별한 의미로 다가옵니다.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 목사의 아내이자 1950년대 말 낯선 땅 한국으로 건너와 60여 년간 장애인과 소외된 이웃을 위해 평생을 바친 한 여성 선교사의 삶. 이 영화는 화려한 업적을 칭송하기보다 치매와 투병이라는 삶의 마지막 장벽 앞에서 여전히 사랑이라는 투박한 파이를 굽는 노모의 일상을 담담히 따라갑니다. 이종은 감독은 아들의 카메라를 통해 소멸해가는 기억 속에서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인간 존엄의 향기를 포착해 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오자마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요양병원에 계시는 어머니는 요즘 제 이름을 가끔 헷갈리십니다. 누구세요?라는 전화기 너머의 물음에 영화 속 트루디 여사의 희미해진 눈빛이 겹쳐지며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엄마, 나야. 아들이라고 말하자 잠시 침묵 뒤에 아, 우리 아들이라며 웃으시는 목소리. 이름은 잊으셔도 아들이라는 감각은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파이 굽는 엄마는 바로 그런 영화입니다. 머리가 잊은 것을 손이 마음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휠체어 위에서도 멈추지 않는 파이 가게의 기적
영화는 혈액암과 치매로 인해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트루디 여사의 현재에서 시작합니다. 한때 장애인 통합교육을 실천하고 교도소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쉼 없이 움직였던 그녀였지만 이제는 자신의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그녀의 손은 여전히 밀가루 반죽을 기억합니다. 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운영하던 파이 가게의 오븐 열기처럼 그녀의 생애는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뜨거운 온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앞서 리뷰했던 영화 넘버원의 은실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숫자가 줄어드는 것보다 아들의 배가 차오르는 것이 더 큰 기적이라던 은실의 대사처럼 트루디 여사도 자신의 기억이 사라지는 것보다 누군가의 입에 파이 한 조각이 닿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트루디 여사 다큐멘터리, 파이 굽는 엄마 결말, 선교사 삶을 다룬 영화에 관심 있는 관객이라면 이 투박한 손의 기억이 전하는 감동에 눈시울이 붉어지게 될 것입니다. 아들 김요한 목사가 기록한 어머니의 침묵과 미소는 그 어떤 웅변보다 강렬하게 가족의 사랑과 섬김의 의미를 되새기게 합니다.
저의 어머니도 치매 초기 증상을 보이시면서 많은 것을 잊어가고 계십니다. 하지만 제가 방문할 때마다 어머니는 부엌으로 가셔서 무언가를 해주시려 합니다. 더 이상 요리를 하실 수 없는데도 냉장고를 열어 뭐라도 꺼내시려는 그 손의 기억. 트루디 여사의 밀가루 반죽을 기억하는 손과 어머니의 냉장고를 여는 손이 정확히 같은 것이었습니다. 돌봄의 본능은 기억보다 더 깊은 곳에 새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쇼펜하우어적 연민(Mitleid)의 힘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을 끊임없는 결핍과 고통으로 가득 찬 맹목적 생의 의지의 지옥으로 보았습니다. 트루디 여사가 겪은 이민 1세대의 편견, 암 투병 그리고 현재의 치매는 그야말로 가혹한 고통의 현장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 고통에 매몰되는 대신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 연민을 통해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녀가 구워낸 수만 개의 파이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이기적인 자아를 깨뜨리고 타인과 연결되려는 성스러운 철학적 실천입니다. 은퇴 후 저도 작은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동네 독거노인분들께 도시락을 배달하는 일입니다. 처음에는 시간이 남아서 시작했지만 매주 어르신들의 얼굴을 뵈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는 시간이 제 자신의 고독을 치유하는 가장 강력한 약이었다는 것을. 트루디 여사가 60년간 파이를 구우며 얻은 것도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요. 타인을 돌보는 행위가 결국 자신을 구원하는 가장 아름다운 역설.
스러지는 기억 속에서도 굳건한 스토아적 내면의 성채
기억을 잃어가는 치매는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가장 잔혹한 외부의 운명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영화 속 트루디 여사는 아픈 와중에도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고통을 견뎌냅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외부의 시련이 닥칠 때일수록 자신의 마음속 내면의 성채로 물러나 평온을 찾으라고 가르쳤습니다. 모든 기억이 휘발되어 가는 순간에도 그녀의 심연에 남은 감사와 기도는 가혹한 운명을 기꺼이 사랑하는 운명애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어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시던 날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어머니 손을 잡고 복도를 걸으면서 엄마, 여기서 편하게 지내라고 말했을 때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원망도 슬픔도 없이 그저 담담하게. 그때 저는 어머니의 그 담담함이 체념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체념이 아니라 운명을 받아들이는 가장 고귀한 형태의 용기였다는 것을. 트루디 여사의 침묵은 패배가 아니라 운명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 이성의 고귀한 승리입니다.
결론 :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구워지는 사랑이라는 파이
영화 파이 굽는 엄마는 종교적 색채를 넘어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불행을 타인을 위한 축복으로 치환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실존의 보고서입니다. 트루디 여사가 보여준 60년의 세월은 우리가 인생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어떤 맛의 파이를 구워야 할지 깊이 고민하게 만듭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혹은 기억이 그대를 배신할지라도 누군가를 향한 연민의 온도만은 식지 않기를 소망해 봅니다. 오늘 저녁 따뜻한 파이 한 조각처럼 누군가의 아픔을 다정하게 감싸 안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글을 마치며 요양병원에 계시는 어머니가 생각나네요. 전화라도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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