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헴넷(Hamnet) 리뷰 : 상실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인간의 위대한 사유


영화 헴넷(Hamnet) 리뷰: 상실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킨 인간의 위대한 사유
영화 헴넷(Hamnet) 이미지(AI 사용)

피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인간은 무엇으로 구원받는가

우리는 종종 위대한 예술 작품 이면에 자리한 창작자의 고통을 간과하곤 합니다. 영화 헴넷은 영문학 사상 가장 위대한 희곡으로 꼽히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단순히 천재 작가의 전기 영화가 아닙니다. 흑사병이라는 거대한 재난 속에서 11살 난 아들 헴넷을 잃은 부부 특히 아내 애그니스가 겪는 처절한 상실감과 슬픔을 섬세하게 조명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몇 년 전 오랜 벗을 떠나보냈던 기억이 밀려왔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시간이 약이다라는 위로를 수없이 들었지만 그 말이 진심으로 와닿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헴넷은 바로 그 세월의 무게를 스크린 위에서 정직하게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가장 사적이고 깊은 슬픔이 어떻게 시대를 초월하는 보편적인 예술로 피어나는지를 수놓으며 관객에게 묻습니다. 피할 수 없는 상실과 죽음이라는 운명 앞에서 우리는 고통을 어떻게 마주하고 극복해야 하는가?

16세기 스트랫퍼드 생과 사가 교차하는 세계관과 인물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6세기 후반의 영국은 전염병의 공포가 일상을 지배하던 시기였습니다. 자연과 교감하며 약초를 다루는 신비로운 여인 애그니스와 라틴어 가정교사로 일하며 세상을 향한 갈증을 품고 있던 윌리엄은 운명적으로 만나 가정을 이룹니다. 영화의 전반부는 이들의 사랑과 생명력 넘치는 일상을 아름답게 그려내지만 쌍둥이 남매 중 아들인 헴넷이 갑작스럽게 병마에 쓰러지며 극은 급반전을 맞이합니다.

이 영화가 코로나 팬데믹을 겪은 2020년대의 관객에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가 있습니다. 전염병의 공포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무력감. 그것은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인간의 근원적 공포입니다. 셰익스피어 원작 영화, 상실과 치유를 다룬 영화, 예술의 탄생을 그린 영화에 관심 있는 관객이라면 이 보편적 고통의 깊이에 오래 머물게 될 것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운명과 스토아적 수용의 고통 

영화 속 흑사병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을 상징합니다. 아들을 잃은 애그니스의 슬픔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말한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일"이 우리 삶을 얼마나 무참히 흔들어 놓을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애그니스는 자연의 섭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인물이었지만 자식의 죽음 앞에서는 그 어떤 지혜도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영화가 위대한 지점은 이 거대한 고통을 서둘러 봉합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은 슬픔을 빨리 극복하라고 재촉합니다. 하지만 저는 벗을 떠나보낸 후 깨달았습니다. 슬픔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통과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영화 속 애그니스가 보여주는 것이 바로 그 과정입니다. 슬픔을 온몸으로 통과하며 점차 상실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묵묵하고도 처절한 여정. 니체가 말한 운명애(Amor Fati)가 가장 아프게 구현되는 순간입니다.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구명정 : 예술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삶을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시계추라 명명하며 이 고통스러운 생의 의지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처를 예술이라고 보았습니다. 영화 후반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아들의 이름(Hamnet)을 딴 희곡 햄릿(Hamlet)을 집필하고 무대에 올리는 과정은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미학을 완벽하게 형상화합니다.

윌리엄은 죽은 아들을 무대 위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는 유령으로 영원히 죽지 않는 예술 작품으로 부활시킵니다. 현실에서는 자식을 구하지 못한 무기력한 아버지였지만 예술이라는 창조적 행위를 통해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극복하고 가장 깊은 고통을 가장 위대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저 역시 은퇴 후 블로그를 시작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글을 쓰는 행위가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을 다독여주는 유일한 치유제가 되어주었기 때문입니다. 규모는 비교할 수 없지만 고통을 창작으로 승화시키는 행위의 본질은 같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결론 : 헴넷이 우리 삶에 남기는 여운

애그니스가 남편의 연극 햄릿을 보며 무대 위에서 아들의 영혼을 마주하고 비로소 눈물을 흘리며 해방감을 느끼는 결말은 예술이 가진 치유의 힘을 압도적으로 증명합니다. 우리는 모두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상실을 겪습니다. 영화는 묻습니다. "우리의 삶을 덮쳐오는 슬픔을 그저 절망으로 남겨둘 것인가 아니면 그 슬픔을 자양분 삼아 내면의 무언가를 새롭게 창조해 낼 것인가." 헴넷의 짧은 생애가 햄릿이라는 영원한 생명으로 치환되는 기적은 오늘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묵직한 철학적 질문과 함께 따뜻한 구원의 메시지를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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