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열여덟 청춘 리뷰 : 맹목적인 젊음의 열병을 치유하는 스토아적 단단함
정상이라는 틀을 거부하는 두 아웃사이더의 유쾌한 반란
누구에게나 열여덟은 가장 눈부시면서도 위태로운 시기입니다. 지난 3월 25일 개봉한 영화 열여덟 청춘은 학교라는 견고한 시스템 안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겉도는 두 여성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어일선 감독은 특유의 섬세한 연출로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별종 교사 혜경(전소민)과 세상에 대해 냉소적인 아웃사이더 학생 희주(김도연)의 만남을 조명합니다. 이 평행선 같은 두 사람이 부딪히며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는 과정은 우리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의 기준에 대해 날카롭지만 따뜻한 질문을 던집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수십 년 전 저를 변화시켜 주셨던 한 선생님이 떠올랐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저도 희주처럼 세상에 대한 냉소가 가득한 아이였습니다. 공부에 흥미가 없었고 선생님들의 훈계는 잔소리로만 들렸습니다. 하지만 국어 선생님 한 분이 저를 다르게 대해주셨습니다. 성적이 나쁘다고 혼내는 대신 제가 쓴 엉성한 일기를 읽고 너는 세상을 보는 눈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한마디가 제 인생을 바꿨습니다. 영화 속 혜경이 희주에게 건네는 시선이 바로 그 선생님의 시선과 정확히 겹쳤습니다. 성적표가 아닌 인간 그 자체를 바라보는 눈.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선생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교육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 영화는 조용하지만 확실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뷰파인더 너머로 마주한 서로의 결핍
혜경은 조금 유별난 교사입니다. 교장 선생님의 눈치를 보지도 학생들에게 억지로 공부를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그녀는 학생들의 진짜 모습을 보려 애씁니다. 반면 희주는 어른들의 위선에 질려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근 상태입니다. 혜경의 지나친 관심이 처음에는 간섭으로만 느껴졌던 희주였지만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혜경의 진심을 목격하며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전소민의 캐스팅이 이 영화에서 빛을 발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런닝맨 등 예능에서 보여주었던 엉뚱하고 거침없는 에너지가 혜경이라는 캐릭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혜경은 교사답지 않은 교사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교사답지 않음이 희주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됩니다. 전소민 김도연 주연의 하이틴 힐링 영화, 교사와 학생의 교감 영화, 아웃사이더 성장 영화에 관심 있는 관객이라면 이 두 배우가 만들어내는 어긋남과 교차의 리듬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은퇴 후 동네 도서관에서 청소년 독서 멘토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처음에 아이들은 저를 경계했습니다. 뭘 알아요 할아버지가라는 시선이 가득했죠. 하지만 억지로 책을 권하는 대신 아이들이 좋아하는 웹툰 이야기를 먼저 물어보기 시작하니 눈빛이 달라졌습니다. 혜경이 희주에게 다가가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가르치려 하지 않고 먼저 들으려 하는 것. 교육의 본질이 지식 전달이 아닌 인간 대 인간의 교감에 있음을 이 영화는 잔잔하게 증명합니다.
청춘의 방황이라는 맹목적 의지를 잠재우는 연민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이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고통으로 소용돌이치는 맹목적 생의 의지라고 보았습니다. 극 중 희주가 보여주는 냉소와 날 선 반항은 사실 정해진 길을 가야 한다는 압박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만들어낸 거친 의지의 발현입니다. 혜경은 이를 훈계로 다스리는 대신 희주가 느끼는 고통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쇼펜하우어적 연민으로 접근합니다. 억압적인 의지를 누르는 것은 더 큰 권력이 아니라 상처를 투명하게 응시하는 따뜻한 연민임을 영화는 보여줍니다.
저도 젊은 시절 희주처럼 세상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습니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든 거지?, 왜 세상은 공평하지 않은 거지?라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깨달았습니다. 그 분노의 밑바닥에는 사실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희주의 냉소가 혜경의 진심 앞에서 무너지는 순간 저는 수십 년 전 국어 선생님 앞에서 처음으로 울었던 그날을 떠올렸습니다.
타인의 시선에 함락되지 않는 스토아적 내면의 성채
교사 혜경은 스토아 철학의 실천가와 같습니다. 그녀는 주변의 비난이나 시선 등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 요인에 감정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대신 내가 옳다고 믿는 길을 가는가라는 자신의 내면에 집중합니다. 세상이 정한 성공의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혜경의 모습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강조했던 내면의 성채가 얼마나 단단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러한 혜경의 태도는 결국 희주에게 전이되어 희주가 타인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의 씨앗이 됩니다.
은퇴 후 블로그를 시작했을 때 주변에서 이 나이에 뭘 하려고라는 시선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혜경처럼 제가 통제할 수 있는 것 즉 오늘 한 편의 글을 정성스럽게 쓰는 것에만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남들의 평가는 제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요. 그 결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혜경이 희주에게 심어준 용기의 씨앗처럼 저도 누군가에게 늦지 않았다는 작은 씨앗을 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서툰 우리 모두를 향한 응원
영화 열여덟 청춘은 완벽한 성장이 아닌 서툰 시작에 박수를 보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타인이 기대하는 배역을 연기하느라 진짜 나를 잃어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영화는 말합니다. 조금은 별종이어도 조금은 늦어도 괜찮다고 말이죠. 혜경과 희주가 서로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단단히 세웠듯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 또한 각자의 마음속에 굳건한 성채 하나를 지어 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청춘이라는 열병을 앓고 있는 이들에게 혹은 그 열병을 잊고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어른들에게 이 영화는 다정한 위로를 선사할 것입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