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 우유, 그리고 치즈 리뷰 : 상실의 아픔을 발효시키는 스토아적 인내와 구원의 연민
제77회 칸영화제 유스상 수상작 상실을 숙성시키는 18살 소년의 가장 투박하고 아름다운 성장기
우리 삶에는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차가운 불행들이 있습니다. 영화 사랑, 우유, 그리고 치즈는 준비되지 않은 채 덩그러니 남겨진 18살 청춘이 그 차갑고 비릿한 불행을 어떻게 따뜻하고 깊은 맛의 삶으로 숙성시켜 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교양소설 같은 작품입니다. 화려한 액션이나 극적인 반전 대신, 프랑스 시골 마을의 소박한 풍경 속에서 정통 콩테 치즈를 만들어가는 소년의 투박한 손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피어나는 진정한 인간다움에 대한 깊은 철학적 사유를 마주하게 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순간에 가장이 되어야 했던 20대 초반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동생들의 학비를 벌어야 했고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파티는커녕 친구들과 밥 한 끼 먹을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때는 원망이 가득했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시련이 왔는가.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없었음을 알게 됩니다. 토톤이 치즈를 숙성시키듯 저의 청춘도 시련이라는 소금물 속에서 숙성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18살 소년의 엉뚱하지만 처절한 콩테 치즈 도전기
주인공 토톤(클레망 파브로)은 매일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파티를 즐기는 철없는 18살 시골 소년입니다. 치즈를 만드는 아버지의 가업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죠. 하지만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삶은 송두리째 뒤바뀝니다. 하루아침에 7살 난 여동생을 홀로 돌보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된 토톤. 막막한 현실 속에서 그가 선택한 유일한 생존 방법은 상금 3만 유로가 걸린 치즈 만들기 경연 대회에 나가 이 지역 최고의 콩테 치즈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 설정이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토톤의 도전이 영웅적 결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치즈를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시작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선택. 이것이야말로 대부분의 인생이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프랑스 칸영화제 수상작, 콩테 치즈 영화, 청춘 성장 영화에 관심 있는 관객이라면 이 투박한 소년의 여정에서 자신의 청춘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클레망 파브로는 연기 경험이 거의 없는 신인이지만 그 서투름이 오히려 토톤이라는 캐릭터에 완벽한 진정성을 부여합니다. 능숙하지 않기에 더 진실한 연기. 치즈를 처음 만드는 토톤의 어설픔과 연기를 처음 하는 배우의 어설픔이 겹쳐지며 스크린 위에서 기묘한 화학 반응을 일으킵니다.
쾌락의 맹목적 의지에서 벗어나 책임의 연민으로
쇼펜하우어는 육체적 쾌락과 끝없는 욕망을 좇는 것을 맹목적 생의 의지라고 칭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전 친구들과 어울려 유흥만을 좇던 토톤의 삶은 이 맹목적 의지에 충실한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홀로 남겨진 어린 여동생을 바라보며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자아를 깨부수기 시작합니다.
저도 가장이 되었던 초기에는 토톤처럼 서툴렀습니다. 동생의 도시락을 싸면서 밥을 태우고 어머니의 약을 사러 가면서 약 이름을 잊어버리고. 하지만 매일 반복되는 그 서투른 돌봄의 시간 속에서 저는 조금씩 변해갔습니다. 나를 위해 사는 삶에서 누군가를 위해 사는 삶으로. 토톤이 매일 새벽 일어나 소를 돌보고 묵묵히 우유를 저으며 동생의 삶을 책임지려는 고군분투는 타인의 고통과 무게를 온전히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쇼펜하우어적 연민의 숭고한 발현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땀 흘리는 시간 속에서 그는 진정한 어른으로 거듭납니다.
치즈를 숙성시키는 시간 : 스토아적 운명애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가난이라는 척박한 현실은 토톤이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가혹한 운명입니다. 만약 그가 세상을 원망하며 주저앉았다면 그의 삶은 부패한 우유처럼 썩어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치즈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온도와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듯 토톤은 스토아 철학의 가르침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끔찍한 운명을 도망치지 않고 끌어안습니다.
이 영화가 사용하는 치즈라는 메타포가 절묘한 이유는 치즈의 제조 과정이 인간의 성장 과정과 정확히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신선한 우유가 치즈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응고라는 고통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다음 압착이라는 압박의 시간을 견뎌야 하고 마지막으로 숙성이라는 기나긴 인내의 시간을 통과해야 합니다. 토톤의 인생이 바로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응고 가장의 무게라는 압착 그리고 치즈 대회를 준비하는 숙성의 시간. 프랑스 쥐라 지역의 푸른 자연이 이 과정의 배경이 되어 고통조차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숙성되어 가는 듯한 시각적 위로를 선사합니다.
결론 : 가장 척박한 땅에서 얻어낸 고소하고 따뜻한 삶의 맛
영화 사랑, 우유, 그리고 치즈는 대단한 성공 신화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상실의 아픔, 서툰 첫사랑 그리고 친구들과의 갈등 속에서 조금씩 다듬어지는 토톤의 일상은 우리네 삶과 완벽히 닮아있습니다. 우리 역시 예고 없는 시련이라는 차가운 숙성 창고에 던져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인내와 사랑으로 그 시간을 견뎌낼 때 우리의 삶 역시 콩테 치즈처럼 깊고 묵직한 풍미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극장을 나서는 길 당신의 삶은 지금 어떤 맛으로 숙성되어 가고 있는지 조용히 음미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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