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김~치! 리뷰 상실의 아픔을 껴안는 쇼펜하우어적 연민과 스토아적 긍정의 미소
화려하고 자극적인 대작들 사이에서 이 작품은 상처 입은 평범한 사람들의 연대를 통해 조용하지만 강렬한 치유의 메시지를 전하는 보석 같은 영화입니다.
갈등과 단절이 일상이 되어버린 현대 사회에 영화 김~치!는 우리는 어떻게 타인과 연결되는가라는 실존적인 질문을 아주 다정하게 던집니다. 화려한 스케일이나 자극적인 서사 대신 영화는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상처 입은 두 사람의 만남에 온전히 집중합니다. 삶의 초점을 잃어버린 젊은 사진작가와 기억을 잃어가는 참전 용사 할아버지.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두 세대가 카메라 렌즈를 사이에 두고 서로의 결핍을 채워가는 과정은 팍팍한 현실 속에서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묵직한 철학적 사유를 이끌어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은퇴 후 시골에서 만난 이웃 어르신이 떠올랐습니다. 매일 아침 마을 입구 정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시는 할아버지. 처음에는 그저 심심하셔서 그러시나보다 생각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돌아가신 아내가 매일 아침 그 길로 산책을 다니셨고 할아버지는 아내의 빈자리를 그렇게 채우고 계셨던 것이었습니다. 영화 속 덕구가 매일 아침 허공을 향해 손을 흔드는 모습에서 저는 그 이웃 어르신의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사라진 사람을 향한 손 흔듦. 그것은 미련이 아니라 사랑이 남긴 가장 아름다운 잔상이었습니다.
렌즈 너머로 마주한 서로의 상처
직장 퇴사와 이별 등 잇따른 상실로 삶의 길을 잃어버린 민경(이주연)은 쫓기듯 시골 마을로 내려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매일 아침 허공을 향해 손을 흔드는 할아버지 덕구(한인수)를 만납니다. 덕구는 교통사고로 애지중지하던 손녀를 잃은 충격과 참전 후유증 그리고 서서히 자신의 세계를 지워버리는 치매를 앓고 있는 인물입니다.
이 영화가 수많은 치매 소재 영화들과 다른 점은 치매를 비극의 장치로만 소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감독은 기억이 사라지는 과정을 슬픔으로만 그리는 대신 사라지는 기억 사이사이에 남아 있는 감정의 잔열에 집중합니다. 덕구는 민경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때도 그녀를 보면 미소를 짓습니다. 머리는 잊었지만 마음은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치매 영화, 세대 간 교감 영화, 시골 배경 힐링 영화에 관심 있는 관객이라면 이 섬세한 감정의 결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영화는 민경이 뷰파인더 너머로 덕구를 관찰하고 그의 가슴 아픈 가족사에 다가가면서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고 서로의 아픔을 보듬는 과정을 잔잔하게 그려냅니다.
맹목적 고통의 굴레를 벗어나는 쇼펜하우어적 동정심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삶이 채워지지 않는 결핍과 고통으로 이루어진 맹목적 생의 의지의 산물이라고 보았습니다. 민경이 겪은 세속적 좌절이나 덕구가 앓고 있는 치매 모두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잔혹한 고통의 바다입니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이 고통을 견뎌낼 위대한 구원책으로 타인의 고통을 나의 것과 동일시하는 연민을 꼽았습니다.
은퇴 후 저도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블로그를 시작한 초기에는 제 이야기만 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독자분들의 댓글을 읽으면서 저와 비슷한 상실감을 안고 살아가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독자분이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아버지를 떠올렸습니다라는 댓글을 남겨주셨을 때 그 한 줄이 제 가슴에 녹나무의 뿌리처럼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자신만의 상처에 갇혀 방황하던 민경이 덕구의 희미해지는 기억을 사진으로 붙잡아주려 노력하고 그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때 비로소 이기적 자아의 껍질이 깨어지고 두 사람은 맹목적인 절망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타인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행위가 결국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강력한 약이 된다는 역설.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깊은 메시지입니다.
스러지는 기억 속에서도 빛나는 스토아적 운명애
기억과 정체성을 잃어간다는 것은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하고 통제 불가능한 외부의 운명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 때 우리가 짓는 "김~치!"라는 찰나의 미소는 스토아 철학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품고 있습니다. 스토아학파는 과거의 상실이나 미래의 두려움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삶을 긍정하고 사랑할 것을 역설합니다.
제가 시골 마을의 이웃 어르신과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 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한 달 전 마을 잔치에서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 속에서 그분은 환하게 웃고 계십니다. 그 미소 한 장이 지금 제 서재 책상 위에 놓여 있습니다. 치매라는 잔혹한 겨울 속에서도 카메라 앞에서 활짝 웃으며 현재의 가장 눈부신 순간을 기록하는 덕구의 모습 그리고 그와 교감하는 민경의 연대는 가혹한 운명마저 기꺼이 껴안는 가장 숭고한 실천입니다.
결론 : "김~치!" 삶의 고통을 긍정하는 마법의 주문
영화 김~치!는 타인의 상처를 다정하게 응시하는 것만으로 얼마나 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증명합니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각자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타인과의 연대는 가장 튼튼한 내면의 성채를 짓는 벽돌이 됩니다. 극장을 나서는 길 견디기 힘든 삶의 무게에 짓눌려 있다면 거울을 보고 나 자신에게 혹은 내 곁을 지키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이 철학적인 마법의 주문을 건네보는 것은 어떨까요? "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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