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크리트 마켓 리뷰 : 폐허에 세워진 맹목적 욕망의 시장 그리고 공존을 향한 스토아적 반란

콘크리트 마켓 영화 리뷰 썸네일, 이재인, 홍경, 포스트 아포칼립스, 쇼펜하우어 맹목적 의지, 스토아적 연대, 자본주의의 민낯을 표현한 이미지

재난이라는 거대한 외부 운명 그 뒤에 남겨진 야만의 시장

대지진이라는 통제할 수 없는 재난이 세상을 휩쓸고 간 뒤 남은 것은 유일하게 붕괴를 피한 아파트뿐입니다. 영화 콘크리트 마켓은 이곳에 형성된 생존자들의 물물교환 공간, 황궁마켓을 무대로 삼습니다. 기존의 화폐와 법은 휴지조각이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자리에는 통조림을 새로운 권력으로 삼는 더 지독하고 원초적인 자본주의가 들어섭니다. 영화는 극단적인 멸망의 상황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기존의 위계질서를 답습하고 또 다른 억압을 만들어내는지를 날카롭게 조명합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IMF 외환위기 때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습니다.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은 동료들 월급이 반토막 난 채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던 시간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인간의 민낯이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같은 부서에서 수년간 함께 일하던 사람이 구조조정 명단에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의 이름을 올리기 위해 상사에게 밀고하는 모습. 콘크리트 마켓의 황궁마켓은 그때의 직장과 정확히 겹쳤습니다. 화폐가 통조림으로 바뀌었을 뿐 생존을 위해 타인을 밟는 구조는 동일했으니까요.

통조림이 지배하는 계급 사회와 불온한 거래의 시작 

황궁마켓은 철저한 약육강식의 계급 사회입니다. 식량과 약품을 장악한 상인회장 박상용(정만식)이 9층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며 군림하고 그의 왼팔 태진(홍경)이 수금조를 이끌며 폭력으로 질서를 유지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단지 내일 하루를 더 살기 위해 부조리한 착취에 무기력하게 순응합니다.

하지만 외부에서 숨어들어온 10대 소녀 희로(이재인)가 등장하면서 이 견고한 질서에 균열이 가기 시작합니다. 희로는 뛰어난 지략과 학교에서 배운 수요와 공급의 원리를 무기로 태진에게 새로운 마켓의 주인이 되자고 위험한 거래를 제안합니다. 이재인과 홍경이 보여주는 팽팽한 긴장감은 이 영화의 최대 볼거리입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한국 영화, 10대 청소년 서바이벌 영화, 자본주의 풍자 영화에 관심 있는 관객이라면 이 불온한 거래가 만들어내는 서스펜스에 시선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쇼펜하우어의 맹목적 생의 의지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본질을 끝없이 무언가를 갈구하고 투쟁하는 맹목적 생의 의지로 보았습니다. 황궁마켓의 지배자들은 살기 위해 타인의 것을 빼앗고 권력을 독점하려는 이 파괴적인 의지의 화신들입니다. 종이돈이 통조림으로 바뀌었을 뿐 타인의 고통을 딛고서라도 자신의 안위를 확보하려는 끈적한 탐욕은 멸망 이전의 세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은퇴 후 뉴스를 보면 재난 상황에서 생필품 가격을 몇 배로 올려 파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종종 나옵니다. 코로나 초기 마스크를 사재기해 폭리를 취하던 모습을 기억하실 겁니다. 콘크리트 마켓은 바로 그 행태의 극단적 버전입니다. 영화는 극한 상황에서 이성이 마비되고 오직 맹목적인 욕망만이 남은 인간 군상을 통해 우리가 평소 얼마나 아슬아슬한 도덕적 기반 위에 서 있는지를 서늘하게 경고합니다.

억압적 시스템을 깨는 연대 스토아적 심파테이아(Sympatheia)

스토아 철학은 지진과 같은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운명에 굴복하기보다 내면의 이성을 지키고 타인과 깊게 연대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영화 후반부 억압받던 이들을 규합하며 희로가 던지는 대사 여기에 주인은 필요 없어. 그냥 같이 살면 돼는 이 작품의 핵심 철학을 관통합니다. 그녀의 선언은 누군가를 짓밟고 군림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맹목적 생존 투쟁의 고리를 끊어내고 서로가 동등한 위치에서 기대어 살아가는 진정한 의미의 연대로 나아가자는 가치의 가장 빛나는 실천입니다.

IMF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가면 그 어두운 시간 속에서도 빛나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구조조정된 동료를 위해 자발적으로 월급의 일부를 모아 생활비를 보태주던 팀원들. 통조림이 아니라 진심을 나눈 그 연대가 결국 우리를 살린 것이었습니다.

결론 : 폐허 위에서도 삶의 거래는 계속되어야 한다

콘크리트 마켓은 디스토피아적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찾아내는 거친 청춘들의 투쟁기이자 철학적 우화입니다. 재난은 우리의 겉치레를 모두 앗아갔지만 동시에 무엇이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인지 그 민낯을 마주하게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역시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수많은 통조림을 차지하기 위한 소리 없는 전쟁터일지도 모릅니다. 무자비한 세계의 룰에 완전히 먹히지 않고 타인과 기꺼이 손을 잡을 수 있는 용기. 극장을 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외부의 폭압에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성채를 단단히 세우는 일일 것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영화 비평] 라라랜드(La La Land) : 꿈꾸는 바보들을 위한 찬가 그리고 가장 현실적인 마법

[영화 비평]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 : 죽음 앞에 선 두 노인이 가르쳐준 진짜 인생 사용법

[영화 비평] 비긴 어게인(Begin Again) : 길 잃은 별들이 뉴욕의 거리에서 부르는 희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