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비평] 초속 5센티미터(2007) :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로 멀어지는 두 사람 그리고 우리 모두의 첫사랑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초속 5센티미터 포스터

초속 5센티미터. 벚꽃 잎이 떨어지는 속도. 그리고 사랑이 스러지는 속도.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2007년 작 초속 5센티미터는 화려한 마법이나 판타지 없이 오직 서늘하고도 잔인한 시간의 흐름과 인간관계의 거리를 스크린 위에 서정적으로 펼쳐냅니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어쩌면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실들을 하나둘씩 담담하게 수용해 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은 지나간 첫사랑의 아련함을 넘어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존재론적 고독과 덧없는 인연에 대한 깊은 사유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본 것이 40대 초반이었습니다. 그때는 그저 예쁜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은퇴 후 다시 본 이 영화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었습니다. 63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 압축된 한 인생의 시간이 제 수십 년의 세월과 정확히 겹쳐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건널목을 사이에 두고 스쳐 지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젊은 시절의 어떤 얼굴이 떠올라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벚꽃과 폭설 : 시간이 빚어낸 잔인한 거리

이 영화의 시각적 연출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가장 서정적입니다. 벚꽃이 떨어지는 궤적, 흩날리는 눈보라, 붉게 물든 노을은 아련한 기억을 눈앞에 소환하는 극사실주의 풍경입니다. 도쿄의 벚꽃길에서 시작해 폭설이 내리는 도치기현, 끝없는 우주를 품은 가고시마까지, 세 개의 단편이 보여주는 공간의 확장은 곧 두 주인공 사이의 거리가 벌어지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특히 1부에서 폭설로 인해 기차가 연착되는 장면은 63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중 가장 긴 시간처럼 느껴집니다. 약속 시간을 훌쩍 넘겨버린 시계를 보며 혹시 상대방이 떠났을까 봐 발을 구르는 소년의 마음. 저도 젊은 시절 비슷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약속 장소에 늦어 허겁지겁 뛰어갔는데 그 사람이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순간. 영화는 그 보편적인 기억을 눈보라라는 장치로 극대화시킵니다.

침묵이 말보다 많은 것을 전하는 영화

초속 5센티미터에서 직접적인 대화는 최소화되어 있습니다. 대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읊조리는 독백과 편지가 서사를 이끌어갑니다. 촘촘한 스토리 라인 대신 누구나 가슴 한구석에 묻어둔 첫사랑의 잔상과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레 흩어지는 인연에 대한 밀도 높은 아련함이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이 영화가 대사 대신 선택한 언어는 빛입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 특유의 빛을 활용한 작화는 계절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색깔과 그림자의 방향이 미세하게 변하며 서서히 변해가는 주인공들의 쓸쓸한 심리를 섬세하게 대변합니다. 봄의 분홍빛이 겨울의 청회색으로, 다시 여름의 주황빛으로 바뀌는 동안 두 사람의 마음도 함께 변해갑니다. 말하지 않아도 빛만으로 이별을 예감하게 만드는 연출. 이것이 신카이 마코토가 애니메이션의 시인이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 : 가슴을 후벼파는 엔딩

영화의 엔딩곡 'One more time, One more chance'가 흐르는 마지막 몽타주는 제가 본 모든 영화의 엔딩 중 가장 슬픈 순간입니다. 성장한 두 사람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가운데 야마자키 마사요시의 목소리는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기회가 있다면"이라고 절규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그 기회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건널목에서 스쳐 지나가는 마지막 장면을 보며 저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인생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건널목을 지나쳤는가. 차단기가 올라갔을 때 반대편에 서 있던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던 순간들. 이 영화는 그 순간들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상실을 안고도 걸어가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임을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총평 : 지나간 인연의 헛헛함을 안고 살아가는 어른들을 위한 영화

초속 5센티미터는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는 고요한 밤 혹은 해가 저무는 늦은 오후에 오롯이 혼자 감상하시길 권합니다. 신카이 마코토 애니메이션, 첫사랑 영화, 아련한 감성 애니메이션을 찾는 분이라면 이 63분이 당신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남을 벚꽃 한 잎을 떨어뜨려 줄 것입니다.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 초속 5센티미터. 영화는 그 느릿한 속도만큼이나 서서히 엇갈려가는 인연의 덧없음을 눈이 시리도록 아름답게 담아낸 명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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