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영화 비평] 고래사냥(1984)
[고전 영화 비평] 고래사냥(1984): 억압된 시대를 향한 '거지 철학자' 안성기의 유쾌한 포효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가수 김수철의 시원한 샤우팅으로 시작되는 노래 '고래사냥'은 알지만, 정작 그 원작인 영화를 제대로 본 사람은 드물다. 1984년 개봉한 배창호 감독의 영화 <고래사냥>은 단순한 코미디가 아니다. 1980년대 군사 정권의 검열과 억압으로 숨 막히던 시절, 자유를 갈망하던 청춘들이 스크린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꼈던 '시대의 탈출구'였다.
최인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은 한국형 로드 무비의 효시(嚆矢)로 평가받는다. 본 글에서는 이 영화가 왜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 영화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지, 그리고 故 안성기 배우가 분한 '민우'라는 캐릭터가 가진 상징성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상징의 해석: 우리가 잡으려던 '고래'는 무엇인가?
영화 속 주인공 병태(김수철)는 짝사랑에 실패하고 세상에 겁먹은 소심한 대학생이다. 그를 이끌고 동해로 떠나는 왕초 민우(안성기), 그리고 벙어리 여인 춘자(이미숙). 이 기묘한 세 사람의 조합은 그 자체로 당시 사회의 소외된 계층을 대변한다.
그들이 잡으러 떠난 '고래'는 실제 동물이 아니다. 그것은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이 잃어버린 '꿈', '자유', '사랑', 혹은 **'자아'**를 상징하는 메타포다. 영화는 병태가 고래(이상)를 찾아 떠나는 과정을 통해, 나약했던 소년이 세상과 부딪히며 어른으로 성장하는 통과 의례를 보여준다. 비록 그들은 고래를 잡지 못했지만, 여정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가슴속 고래는 이미 헤엄치고 있었음을 영화는 역설한다.
안성기의 파격: 엘리트에서 '거지 철학자'로
이 영화의 백미는 단연 안성기의 연기 변신이다. 이전까지 지적이고 반듯한 엘리트 이미지가 강했던 그는, <고래사냥>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거지 행세를 하는 '민우' 역을 맡아 관객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민우는 단순한 거지가 아니다. 그는 세상의 위선과 가식을 비웃으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거지 철학자'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 가슴에 불을 질러봐."라는 그의 대사는, 억눌려 있던 당시 관객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는 선동이자 위로였다. 안성기는 특유의 능청스러움과 페이소스 짙은 눈빛으로, 시스템 밖으로 스스로 걸어 나간 자유인의 모습을 완벽하게 형상화했다. 이는 최근 별세한 안성기 배우의 필모그래피 중에서도 가장 에너지 넘치는 명연기로 기억된다.
결말의 의미: 현실로 돌아올 용기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동해 바다. 춘자는 목소리를 되찾고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병태와 민우는 다시 서울이라는 현실로 복귀한다. 보통의 영화라면 유토피아에 남거나 비극으로 끝났겠지만, <고래사냥>은 쿨하게 현실을 긍정한다.
민우는 병태에게 말한다. "고래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거야." 이는 도피처(동해)가 아닌 현실(서울)에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고래)를 얻을 수 있다는 배창호 감독의 메시지다. 마지막 장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서울 거리를 활보하는 병태의 모습은 80년대 청춘들에게 보내는 힘찬 응원이었다.
늙지 않는 청춘의 에너지를 위하여
<고래사냥>은 개봉한 지 40년이 넘었지만, 영화가 뿜어내는 에너지는 여전히 젊고 뜨겁다. 시대는 변했지만, 취업난과 경쟁 사회 속에서 위축된 2026년의 청춘들에게도 '자신만의 고래'는 필요하다.
답답한 현실에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을 때, 혹은 故 안성기 배우의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마주하고 싶을 때.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보길 권한다. 스크린 너머로 "자, 떠나자!"라는 함성이 들려올 것이다.
*"안성기 배우가 <고래사냥>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연기했다면, 10년 뒤 **<투캅스(링크)>*에서는 능청스러운 부패 형사로 변신해 또 한 번의 전설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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